제1화. 프롤로그
시작은 좋았으나.
총체적으로는 재수 없는 날이었다.
아침에는 대학교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다미는 기뻐했다. 1년간의 재수 생활 끝에 꽤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꼭 이 학교에 가고 싶었다. 대학교 홈페이지에서 본 학교 사진은 4계절 내내 아름다웠다. 다미는 캠퍼스를 걷는 상상을 했다. 남들보다 1년 늦은 새내기 생활이지만, 저 사진 속 풍경에 그녀가 들어간다는 것만으로도 다미는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상상은 등록금 안내 페이지에서 멈췄다.
사립대학교 등록금은 다미의 예상보다 높았다.
다미는 즐거운 상상을 하려 애썼다. 요즘에는 장학금도 잘 나온다고 하잖아, 내부 장학금, 외부 장학금 등등. 그리고 대학가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년간 공부만 하느라 체력이 바닥나긴 했어도, 젊으니까 건강은 금방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즐거운 만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며 다미는 부모님에게 등록금 고지서를 뽑아 보여 드렸고…….
잠시 후, 뺨을 맞았다.
“엄마……? 지금, 뭐, 왜?”
엄마는 대답 대신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손으로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손에서 가죽 지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뭐냐고? 허이구. 사람이 돈을 벌어야 사람이지, 너 지금 이십 년간 먹여 살려 놨더니, 철없이 무슨 소리야? 이런 데 가겠다는 게 말이나 돼?”
“무슨 말이야. 내가, 대학 어디 지원했는지 다 말했었잖아! 이거, 공부해 보고 싶었다고.”
“대학만 말했지, 엄마한테 이런 사기를 쳐? 너 행정학과 쓴다고 했잖아. 그런데 사회과학은 또 뭐야? 너 이런 거 배웠다가는, 책 쌓아 놓고 땔감으로 못 쓴다고 징징대다가 얼어 죽어! 재수 시켜 달라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기에 얘가 행정고시라도 보려나 보다 해서 마지막 기회를 준 거야. 그런데 뭐? 학문 배워서 여자 교수님이라도 되려고 그래? 그런 건 돈 많은 애들이나 되는 거야!”
옆에서는 아빠가 한마디 보탰다.
“여보, 지갑 함부로 던지지 마. 사람이 돈을 아낄 줄 알아야지.”
“아빠.”
“왜 나를 봐. 가계랑 교육은 엄마 담당이야. 아빠는 너를 응원하지만, 이건 너와 엄마의 문제란다.”
아빠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엄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아빠의 뒤통수를 쳐다보았지만, 다시 고개를 다미에게로 돌렸다.
“아무튼, 돈 못 내준다. 고등학교 때 배운 거 까먹기 전에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해. 한 학기에 오백만 원 헛돈 날리느니, 그거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돈으로 쓰면 일 년은 족히 쓰겠네.”
“엄마, 엄마. 대학은 보내 준다고 했잖아요.”
“갈 거면 작년에 갔어야지. 엄마는 네가 우는 거 처음 봐서 기회를 줬던 거야. 우리 살림에 재수씩이나 시켜 줬는데, 그럼 먹고살 길을 찾아야지.”
“엄마, 딱, 딱 한 번만요. 응? 딱 한 번만 내 줘. 다음 학기부터는 계속 장학금 받을게. 장학금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할 거니까. 진짜 이번 딱 한 학기만.”
다미는 지갑으로 얻어맞았을 때의 울분도 잊고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엄마는 다시 지갑을 들어 올렸다. 다미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현관문 열리며 오빠가 귀가했다.
“엄마, 아빠가 밖에서 담배 피우더라? 무슨 일 있었어?”
“왔어? 아유, 많이 춥지. 글쎄 네 동생이 뭐라는 줄 알아?”
“뭐가 내 동생이야. 엄마 딸이지.”
엄마는 오빠 코트를 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쟤가 재수 끝나고 사람 노릇 좀 하려나 했더니, 엄마가 말한 과 말고 엉뚱한 과를 지원해 놓고 등록금 달라고 그러는 거야. 대학 가서 공부하고 싶으시단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면 고삼 때 좀 하지 그랬어, 어? 그때 충분히 못 해서 재수까지 한 건데.”
오빠는 다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히죽거렸다. 다미는 당장 달려 나가 저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저 인간은 다미가 고3 생활을 망쳤던 원흉이기도 했다. 오빠는 수능을 3번 보았고, 삼수 끝에 간 대학에서 사고를 쳤다. 집안의 돈이란 돈은 전부 오빠 변호사 비용에 들어갔다.
그때 고3이었던 다미는 학원비는커녕, 용돈도 제때 받지 못했다. 저녁도 못 먹고 귀가했을 때 밥솥이 비어 있으면 다행이었다. 보통 오래 방치된 쌀밥에 곰팡이가 슬었거나, 아니면 오빠가 자기 침 묻은 숟가락으로 퍼먹던 흔적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기 마련이었다.
생각해 보니 새삼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미는 심호흡을 했다.
다미가 단기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뛴다 해도, 등록금 수납 마감일까지는 맞출 수 없다. 어떻게든 엄마와 아빠를 설득해야 했다.
“일 년 내로 갚을게. 일단 등록부터 하고, 그다음에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뛰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너 지금 엄마랑 흥정해? 흥정하냐고. 됐어. 아휴, 그래도 딸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서 키우는데 귀염성도 없고.”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빠가 히죽히죽 웃으며 다미를 내려다보았다. 다미는 그 기분 나쁜 시선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오빠는 손가락을 들어 다미의 배를 찔렀다.
“신장이라도 팔아. 너한테 봐 줄 만한 게 그것밖에 더 있겠냐?”
그게 다미가 가족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다미는 손에 잡히는 것을 오빠 얼굴에 내던졌다. 오빠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멍한 표정으로 다미를 쳐다보았다. 바닥에 쿠션이 떨어졌다. 전혀 아프지 않았을 텐데. 곧 오빠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려 했다.
다미는 오빠가 난리를 피우기 전에 집을 나왔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빠는 다미가 지나갈 때 입만 헤 벌리고는 집 베란다와 다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뭐라 말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엄마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식과 제대로 말하지도 않는 인간. 그러면서도 자기는 자식을 혼낸 적이 없으니 참 좋은 아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
다미는 아빠를 향해 입 모양으로 뭐라 웅얼거렸다. 아무 말도 아닌 웅얼거림일 뿐이었지만, 아빠는 그게 욕인 줄 알았는지 담배를 내던지고는 다미를 쫓기 시작했다. 다미는 속으로 웃으며 골목을 달렸다. 자기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욕으로 들렸겠지, 안 그러면 쫓아오겠어?
오빠와 아빠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다미를 쫓는다.
다미는 속도를 높였다. 뒤늦게 핸드폰도 지갑도 갖고 나오지 않았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어차피 나 돈 없잖아? 핸드폰도 정지됐고.’라는 생각도 뒤따라왔다.
잃을 게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 봐야 얻을 것도 없었다.
정말, 발걸음을 멈춰야 할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걸 다미가 깨달았을 때. 등 뒤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아빠가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듣는다. 다미는 잠시 망설였고, 발걸음이 잠시 늦춰졌다.
다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
뒤돌아보는 순간.
다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아빠와 오빠가 아니라, 뿌옇게 흐려진 서울 하늘과 팔다리가 꺾인 채 그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몸뚱이였다.
통증은 없었다.
시야가 어두워지기 전. 마지막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비명, 경적 소리, 욕설, 그리고 귀를 찢을 듯한 이명이었다.
1장. 마녀재판이거나 투기장이거나 (1)
죽기 직전에는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더니, 눈에 보이는 건 시꺼먼 아스팔트 도로와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의 신발뿐.
처음에 다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만약 오빠가 급하게 달려와 그 면상을 들이밀고 ‘괜찮냐?’라고 묻기라도 한다면?
이승에서 보는 마지막 광경이 그딴 거라면 다음 생 내내 꿈자리가 사나울 것만 같다는 생각에 다미는 눈을 감았다.
주마등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마지막으로 눈에 비친 것은, 다미가 합격한 대학교 사이트에서 본 캠퍼스 풍경 사진들. 그리고 20살을 갓 넘긴 입장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수백만 원짜리 등록금 고지서…….
‘좋은 것만 보고 가도 모자랄 판에…….’
다미는 애써 구질구질한 기억들을 털어 냈다.
만약 다음 생이 온다면, 적어도 말 안 통하는 오빠 새끼는 없는 집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빌면서.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세계는 부드러운 햇빛 아래에 있었다.
서울의 미세먼지도, 비둘기 깃털이 달라붙은 아스팔트도, 다미의 피가 흩뿌려진 횡단 보도도 보이지 않는다.
숲속 개울가, 차갑고 깨끗한 물이 돌에 부딪혀 다미의 발목을 스쳤다. 먼 곳에서는 새 소리가 들린다.
‘여긴 어디야.’
다미는 제일 먼저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팔다리는 다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분명히 아까 차에 치여 날아갔을 땐 다리가 뒤로 꺾여 있던 것 같았는데.
다미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은 채 재수생 공부하는 형태로 고정된 무릎에서 뽀독 소리가 났을 뿐, 걷고 서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미는 결론을 내렸다.
“죽어서 저승에 왔든지. 아니면 인생 마지막 꿈이거나!”
【둘 다 아니다.】
“엥?”
다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쨍한 햇빛이 다미의 눈을 습격할 뿐, 그 아래에는 인기척 하나 없는 수풀뿐이다.
TV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같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여긴 너의 세계가 아니다. 돌아본다 해도 네가 납득할 수 없는 곳.】
다미는 잠깐 이성과 예의의 끈을 내려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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